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이 나오스케 (문단 편집) == 생애 == 1815년, 히코네([[시가현]]) 번주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이 나오마사의 7대손이다. 위로 형들도 많은 데다가 어머니가 첩실인 탓에 그에게 후계자 자리가 돌아갈 기회는 없었다. 노베오카번에서 양자로 들이려고 생각했던 적을 빼면 다른 가문에서 양자이야기도 없었을 정도. 양자가 되기로 해서 동생과 함께 [[에도]]에 갔는데, 그 집안이 같이 간 동생을 마음에 들어해서 동생을 양자로 삼아서 나오스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른 형들은 모두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나오스케만 남은 것은 혹시나 가독을 이을 사람이 없어질지도 모를 사태에 대비한 스페어용이었다는 말도 있다. 부친의 사후 산노마루 오스에초의 저택으로 옮겨가 15살 때부터 32살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은둔자처럼 지내면서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배웠다. [[서예]]나 [[다도]]라든지 [[와카]], [[츠즈미]] 연주, [[노가쿠]], [[참선]] 같은 수많은 예술을 배웠으며 그 외에도 창술, [[거합도]] 등 무술을 익히기도 했다. 그래서 별명이 '챠카퐁'이라고 불렸다. 차의 '''챠''', 와카의 '''카''', 츠즈미 소리의 '''퐁'''. 그가 저술한 근대 다도의 명저 <茶湯一会集>의 권두에는 유명한 [[일기일회]](一期一會[* 이치고이치에(いちごいちえ). 원래 [[센노 리큐]]가 남긴 말을 제자 야마노우에 소우지가 적어둔 것을, 간결하게 사자성어로 정리한 것이 이이 나오스케다.])가 있다. 학문적으로는 [[국학(일본)|국학]](國學)을 공부했다. 1846년, 14대 히코네 번주이던 형 이이 나오아키의 후계자가 사망하면서 후계자가 없게되자 형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식으로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850년 이이 나오아키가 사망하자 36살의 나이로 15대[* 13대로 치기도 하는데, 선대에 번주 두 명이 중임한 적이 있었기 때문.] 히코네 번주가 되었다. 히코네 번에서 번정개혁으로 명군 소리를 들었다. [[요시다 쇼인]]은 비할 데 없는 명군이라는 평을 했다. 1853년 [[매튜 페리(군인)|페리]]의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 때 히코네 번은 [[요코스카시|우라가]]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중앙정계에서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가 미국의 개항요구에 대해 자문을 구하자 본래 쇄국주의자였음에도 "임기응변으로 대응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교역해야 한다." 하고 개국을 주장했다. 다만 이이 나오스케가 적극적인 개국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방편에 불과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즉 자기 반대파들이 양이론자들이라 개국론자로 변신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기본적으로 양이론자이지만, 서양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일단 개국하여 선진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 무렵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해서 국정을 이끌 능력이 없었으므로, 막부의 정치는 로주 아베 마사히로가 주도했다. 본래의 막부체제와는 달리 아베 마사히로는 세력이 큰 다이묘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방식을 취한 덕분에, 이이 나오스케는 외교자문 역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했다. 그러나 아베 마사히로나 [[미토시|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양이론에 가까운 입장이었고, 특히 히토츠바시 파를 형성하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존황양이]]론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때문에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이이 나오스케는 갈등이 빚어졌다. 미국과의 통상조약 비준을 놓고 양측은 대립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아베 마사히로에게 강력하게 어필해 개국론자인 마쓰다이라 노리야스와 마쓰다이라 다다가타를 로주에서 해임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여기에 강력하게 반발해 개국론자이자 자신의 친구인 홋타 마사요시를 노중수좌로 밀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1857년, 아베 마사히로가 급병으로 사망하자 홋타 마사요시는 마쓰다이라 다다가타를 다시 로주로 불러올렸다. 여기에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던 [[히토츠바시파]]와 대립해 [[기이]] 번의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옹립하려 했다. 1858년 4월 23일, 난키 파와 홋타 마사요시, 마쓰다이라 다다가타 등의 정치공작에 의해 이이 나오스케는 다이로(大老)[* 도쿠가와 정권에서 쇼군의 보좌역으로 임시적으로 로주들의 위에 위치하는 최고직. 그 기원에 대해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대로]] 참고. 이이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부터 막부의 중신으로 활약한 명문 가문으로 대로로 임명된 경우가 나오스케 선조에 5명이 있었다.]에 취임했다. 그리고 12월에는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14대 쇼군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른 현안문제이던 [[미일수호통상조약]]은 [[고메이 덴노]]의 칙허를 받지 않고 [[가나가와현|가나가와]]에서 체결했다. 천황의 허락을 받을려고 최선으로 노력했는데 고메이 천황이 좀처럼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미국의 영사였던 해리스가 언제까지 미루냐고 겁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체결을 했다. 막부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도 있다. 이를 보고 외국인을 싫어한 [[고메이 덴노]]는 크게 분노했고, 히토츠바시 파도 '''누가 니 맘대로 조약체결하래?''' 라고 이이 나오스케에게 따졌다. 이이 나오스케는 이를 홋타 마사요시와 마쓰다이라 다다가타의 책임으로 돌려 그들을 해임시켰다. 그들의 후임으로 오타 스케모토, 가나베 아키가츠, 마쓰다이라 노리야스를 임명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양이론자들을 막부에서 축출시켰는데 자신과 대립하던 미토 번의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후쿠이현|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에게 칩거형을 내렸고 여러 관리들을 파면시켰다. 그러나 1859년, 오타 스케모토와 가나베 아키가츠가 해임되면서 점점 고립되는 형국에 몰리게 된다. 이런 조치에 미토 번의 가신들은 분노하여 고메이 덴노에게 하소연했고 이에 고메이 덴노는 막부를 건너뛰고 미토 번에게 무오의 비밀칙서를 내려 전례없는 파란을 일으켰다. 덴노가 직접 [[다이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은 막부의 권위를 손상하고 그 존재 여부를 묻는 문제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사태였다. 이이 나오스케는 크게 분노했다. 그리하여 히토츠바시파와 존왕양이파를 쥐 잡듯 때려잡기로 결론 내렸다. 이로써 [[안세이 대옥|안세이의 대옥사]]가 일어났다. 결국 미토 번의 가신들은 분노하여 이이 나오스케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1860년 3월 24일[* 음력 3월 3일] [[에도 성]]의 [[사쿠라다 문 밖의 변|사쿠라다문 밖에서 입성하던 이이 나오스케가 탄 가마 행렬을 기습해 암살했다.]] 그가 암살된 후 히코네 번은 안세이의 대옥사 등 실정을 이유로 감봉조치를 받아 막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후계자를 미리 정해놓지 않아, 죽은 뒤 한달 동안 살아 있는 것처럼 가신들이 연극을 한 후[* 주군이 암살되면 그 번은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로 없어지는데, 이미 나오스케라는 거물이 죽은데다 그 번까지 없애버리면 거꾸로 히코네번이 막부의 적이 되는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이런 연극을 해야 했다. 적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았던 막부는 당연히 이 연극을 부추겼다.(막부에서 의도적으로 위문품을 보내서 각 다이묘들에게 죽은 사람에게 병문안을 가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런 연극은 과거에도 있었는데 1747년 호소카와 가문의 구마모토 번의 다이묘인 호소카와 무네타카가 갑작스런 습격을 받고 죽은 일이 있었다. 문제는 무네타카가 당시 아들이 없었으며 그렇다고 나이가 31세라 양자도 들이지 않아 졸지에 구마모토 번이 없어지고 그 번의 가신들은 모두 실업자가 될 처지가 되었는데 이 때 다테 무네무라가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치료해라' 라고 말했고 그 말에 따라 무네타카의 시체를 저택으로 옮긴 뒤 무네카타가 죽어가며 동생 나가오카 노리오를 후계자로 삼았다고 구라를 쳐서 간신히 가이에키만은 면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때도 저 뻥이 순전히 100% 먹힌건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한다면야 누가봐도 안 통할 뻔한 사기극이었지만 다테 가문이 막부에서의 입지가 컸기 때문에 먹힐 수 있었다. 더 많은 이야기는 [[호소카와 타다오키#s-3|호소카와 타다오키]] 항목의 ‘구요의 문장’ 단락에 나온다.] 서자이지만 제일 연장자였던 차남 나오노리가 가문을 이어 최후의 히코네 번주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